시민기자 북클럽 4기입니다. 꾸역꾸역은 '어떤 마음이 자꾸 생기거나 치미는 모양'을 뜻합니다. 책을 읽고 치미는 마음을 글로 잘 담겠습니다. <편집자말>
'멸망'이라는 단어가 쓰였음에도 조금의 무거움도 느껴지지 않는, 마치 무슨 이벤트 소식이나 흥미로운 가십을 전하는 듯한 제목의 소설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2025년 5월 출간)을 처음 접했을 때 영화 <돈 룩 업>이 떠올랐다. 2021년에 개봉한 아담 맥케이 감독의 이 블랙 코미디는 탈진실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천문학과 대학원생인 케이트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 분)는 어느 날 지구로 다가오는 거대한 혜성을 발견한다.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약 6개월. 담당 교수인 랜들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와 함께 이 소식을 급히 정부에 알리지만 대통령은 중간선거에만 신경 쓸 뿐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
종말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에서, 정치인은 지지율을 위해, 언론은 시청률을 위해, 기업가는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이로 인해 국민들은 하늘을 보지 말라는 '돈 룩 업' 진영과 혜성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룩 업'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게 된다.
결국 대응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모두가 멸망을 맞는 결말을 보며 씁쓸한 여운이 남았었는데, 소설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는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 날 유튜브 영상을 통해 날아든 외계인의 인류 말살 경고. 사람들은 처음엔 장난이라 여겼지만, 영상의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협박이 사실일 가능성이 커지자 동요한다. 하지만 정부의 공식 발표도 없고, 전문가들도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 사람들은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주인공인 지민 역시 라멘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던 중, 10개월 전 헤어진 전 남자친구 호수에게서 뜻밖의 연락을 받는다. 그는 현실과는 다른 평행 세계가 존재한다며 지민에게 함께 그곳으로 넘어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지민은 떠나지 않고 남기로 결심한다.
"그러니까 살아 보겠다고 나 혼자 다른 세계로 떠나거나 하는 일은 없어. 그것보다는 이 세계가 사라지기 직전까지, 이 세계가 사라지지 않을 방법을 찾으려 아등바등할 거야." - 116쪽
지민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집 앞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루리코의 말 때문이었다.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거야". 처음엔 다른 사람들처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대처할 방법이 없으니 그냥 하루하루를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지민이었지만, 이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뀐다.
하늘을 날 수도 없고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것도 아닌, 그저 보통의 대학생에 불과하지만, 인류의 절멸을 막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며 그녀는 뜻하지 않은 여정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양자역학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기발한 방식으로 외계인을 물리치고, 소설은 '해피 엔딩'도 '새드 앤딩'도 아닌 의외의 결말로 막을 내린다(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어보시라).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할 때
일개 대학생과 그 주변 인물들이 인류를 구한다는 이 소설의 설정은 얼핏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현실과 닮아 있다. 미약한 개인들이 힘을 모아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거대한 세력(외계인)을 물리치는 결말을 보며, 지난 겨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은박 담요를 뒤집어쓰고 한파와 눈보라를 견디며 윤 전 대통령의 체포를 촉구하던 키세스단이 떠올랐다.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던 청년들이 내란 사태를 겪으며 연대의 의미를 깨닫고 광장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모습은 영웅으로 각성해 가는 지민의 모습과 겹쳐진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길 위의 시민들과 소설 속 지민의 모습에서 이 문장이 떠올랐다. 절망 속에서도 click here 끝까지 희망을 품고 행동하려는 굳은 의지를 담은 이 격언은 불안한 현실 속을 부유하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일깨워준다.
비록 소설 속 인물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저 사과나무나 심겠다'라며 체념 섞인 어조로 말했지만, 같은 문장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 가능하면 '체념'보다는 '의지'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지구인들, 안녕. 내 이름은 셀타 드리온느. 우리는 지구에서 약 108만 광년 떨어진 더플칸리엡이라는 행성에서 왔어. (중략)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는 지구인들을 이용하기 위해 찾아왔다. 현재 우리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지구에는 약 80억 명의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중 0.0001퍼센트인 8천 명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소멸시킬 예정이다. (중략) 당장 버튼을 누를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앞으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줄 테니 남은 인생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보는 것.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길이 열릴 수 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았던 지민의 행동도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모이자 결국 성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소설은 할리우드식 거대한 영웅 서사는 아니지만, 평범한 주인공의 기세 좋은 활약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을 구원하는 영웅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영웅들이 각자의 사과나무를 심어 나갈 때, 세상은 좀 더 아름답고 울창한 숲으로 변해갈 것이다.
Comments on “머그컵”